사랑의 이유 ①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랜만에 써보는 간단 독후감의 대상은 해리 G. 프랭크퍼트의 '사랑의 이유'이다. 다만 몇 자 읽지도 않았음에도 책을 좀 잘못 골랐구나 싶었던 이유는 이게 당최 무슨 말인가 싶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는 점이다. 마치 학창시절에 풀었던 사설업체가 출제한 모의고사 언어영역의 살짝 맛탱이간 지문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이게 나의 독해력 이슈 때문인지, 혹은 원문이나 그 번역에 배려가 부족한 것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책을 계속 꾸준히 읽어나갔던 이유는, 온몸을 비틀며 읽다보니 저자가 말하려는 바를 향해 조금씩 쌓아가고 있는 빌드업이 느껴졌기 때문이고, 또한 책에서 다루는 것들이 평소에 내가 미쳐있는 주제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2) 사랑과 그 이유, 3) 자기-사랑(self-love) 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다루는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약간 스포하자면 이 세 챕터들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챕터들이 스무스하게 연결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였다.
'사랑의 이유'를 읽다보니 사랑을 주제로 하는 노래들 중 그 느낌이 이전과는 달라진 것이 몇몇 있었는데, 사랑에 관한 내 나름대로의 어떤 관점이 형성되고 있다는 보람찬 신호가 아닐까 싶다. 이 두루뭉실한 느낌을 좀더 명확하게 붙잡아 두고 싶은데, 이를 위해 내가 '사랑의 이유'를 이해하려고 발버둥 쳤던 과정을 최대한 정리해보려 한다. 우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루는 첫번째 챕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저자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고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우리와 연관되는 구체적인 질문이라고 한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내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고, 나아가 그 대답은 삶을 경험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속하는 철학적인 문제들은 '실천 이성의 일반론'의 영역에 귀속된다고 한다.
위 내용은 내가 나름대로 순화시켜 적어본 것인데, 이 책은 계속 이렇게 뭔가 당연해보이면서도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실천 이성의 일반론'이라는, 이공계인 나에게 다소 가혹한 단어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 이성'과 대비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실천 이성(practical reason)이라는 것은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중요한 판단 기준 중 하나가 바로 도덕이다.
그런데 저자는 인생의 방향을 정함에 있어 도덕성이 갖는 중요성은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가치있게 생각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우리가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물음에 대하여, 도덕성이 제시하는 답변은 생각보다 훨씬 협소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수긍이 되는 것은, 우리가 행동을 결정할 때 도덕적인 기준인 '옳고 그름'만을 따져야 할 이유도 그러할 필요도 없으며, 이것만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영역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도덕철학 보다 더욱 포괄적이고 심오한 '규범적 실천 이성 이론'에 의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게 뭔소린가 싶은데, 다행이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이 '규범적 실천 이성 이론'이 무엇인지까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건 도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질문이라는 점이다.
'마음 쓰는 것'에 관하여
'실천 이성 분석'은 익숙한 개념들을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이는 아마도 실천 이성이 우리가 겪고 있는 경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익숙한 개념'의 한 예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want), 즉 인간의 욕구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기본 개념은 너무 많이 사용되어 오히려 의미가 모호해진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문제를 이해하는 과정에 혼란을 발생시킬 수 있기에, 부가적인 개념들을 명확히 정의하여 이러한 기본 개념을 풍부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부가적인 개념으로 '마음 쓰는 것'(care)을 소개하고 있다. (참고로 저자는 마음 쓰는 것의 가장 중요한 형태중 하나가 바로 사랑이라고 한다!)
'마음 쓰는 것'이란 게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걸까? 일단 어떤 것에 마음을 쓰는 것과 그것을 원한다는 것은 다르다. 우리의 많은 욕구(ex 야식으로 지코바 먹고싶다)는 실제로 매우 보잘 것 없는 것들이고, 우리는 분명 이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즉, 우리는 이러한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또한 어떤 것에 마음을 쓰지 않더라도, 심지어 욕구를 없애려고 노력하더라도 욕구는 그 자체의 강도를 근거로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계속하여 존속할 수 있다. 그러나 욕구 대상에 마음을 쓰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써 그 욕구에 묶여있는다. 즉, 욕구의 충족을 원함과 함께 자신의 욕구가 존속하기를 원하는 또 다른 욕구가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이 '마음 쓰는 것'을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적 특성으로 이해하고 있다. 애견 동호회 회원이라면 '아니 우리집 댕댕이는 나한테 마음을 쓰고 있는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댕댕이도 욕구가 있다. 보더콜리 정도 되면 사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향한 태도를 형성할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신에게서 분리시켜 대상화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의 다양한 욕구들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욕구에 관한 욕구를 형성하는 반성적 능력을 갖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우리나 댕댕이나 욕구가 행위를 유발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욕구들 중에 특정 욕구가 행위의 동기이기를 원하거나, 혹은 동기가 아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원하지 않는 욕구에 저항할 것인데, 당연하게도 그 저항에 실패할 수 있다. 다만 저자는 어떤 사람이 욕구하는 행위를 수행하고, 또한 그 수행 동기가 진실로 원하는 동기인 경우에 진정으로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번엔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일단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임에도 그에게 중요한 무언가(ex 오존층의 존재)가 있을 수 는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는 그 무언가가 그가 마음을 쓰는 어떠한 것(ex 그의 건강)과 연관을 갖기 때문일 수 밖에 없다. 즉,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러한 사람도 여러 욕구를 가질 수 는 있고 그 중에 더 강한 욕구가 있을 것이지만, 자기자신이 어떤 욕구를 선호하는지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람이 갖는 의지는 진정 그 자신의 의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것에 정말로 마음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마음을 쓴다는 것은 어떠한 의지적인 지속성을 스스로에게 제공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은 주제적 통일성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즉, 마음을 쓴다는 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연결하고 묶어주는 불가결한 활동인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것에 마음을 씀으로써 세상에 중요성을 주입하고, 우리 자신의 세상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일까?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살펴보자. 이는 삶의 방식을 묻는 것으로 이 질문에 답하려면 삶의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질문자인 '우리'가 직접 구성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떤 삶의 방식이 우리가 구성한 기준을 가장 잘 충족시키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잘 생각해보면, 삶의 방식을 평가하는 기준을 알고 있으면 이 기준에 가장 잘 들어맞는 방식으로 살면 될 것이다. 이러한 기준을 식별하는 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일종의 순환에 빠지게 한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에 마음을 쓰게 되면 그는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 의해 인도된다. 이는 곧 그 사람의 행위를 형성하고, 어떤 인생 영위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지를 규정한다. 그 사람이 마음 쓰는 사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그 사람의 답변을 구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이 규범적인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우리는 실제로 무엇에 마음을 쓰고 있는가"라는 사실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어떤 사물에 마음을 써야하는가', '얼만큼의 마음을 써야하는가'는 문제는 불확실함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이나 자식의 행복에 대해 마음을 쓴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러한 마음 쓰는 것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거나 비합리적임을 깨닫더라도 계속해서 마음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저자는 이러한 마음 씀은 '합리성의 명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사랑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분명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할 때 그것이 옳고 그른지, 또는 그 중요성을 엄밀한 증명으로써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여기서 저자는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쓰는, 즉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기에 그러한 증명 없이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할 가치가 있다.